
요즘 출퇴근길이나 운동할 때 오디오북을 하나 듣고 있습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입니다.
약 2주일 정도 걸려서 다 들었네요.
학창 시절엔 이걸 영화로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남아있던 건 사실 큰 줄거리 정도였어요.
트로이 전쟁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
외눈박이 거인도 나오고,
마녀 키르케도 나오고,
노래로 사람 홀린다는 세이렌도 나오고.
그때는 그냥 재밌는 모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오디오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보니 조금 다르게 들리더군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봅니다.
예전엔 오디세우스가
모험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가 재밌었다면,
이번엔 이상하게도 오래 버티는 사람들 쪽이
더 귀에 들어왔습니다.
오디세우스,
생각보다 힘센 영웅은 아니었다
듣다 보니 조금 의외였던 부분이 있습니다.
오디세우스 하면 보통 영웅을 떠올리는데,
막상 들어보면
힘으로 다 해결하는 사람은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상황 살피고,
상대 속이기도 하고,
때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자기가 누군지
바로 안 밝히는 장면도 많고요.
처음엔 좀 답답했습니다.
'그냥 사실대로 얘기하면 되지 않나' 싶었는데,
듣다 보니 오히려 그게
오디세우스의 힘 아닌가 싶더군요.
모든 상황에서 당장 움직이는 게
능사는 아니니까요.
살다 보면 내가 맞다고 생각해도
좀 기다려야 할 때가 있고,
당장 해결하겠다고 나섰다가
일이 더 꼬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류 일을 20년 넘게 하다 보니
이 부분이 유독 와닿았습니다.
현장 문제도 대부분 한 번에 안 풀립니다.
거래처랑 협의해야 하는 일도 있고,
배송이나 차량 문제처럼
당장 답이 안 나오는 일도 있고요.
일단 상황부터 확인하고,
이것저것 방법 생각해보고,
상대 얘기도 들어보고 나서
움직여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오래 일하다 보면
빨리 해결하는 것보다
제대로 해결하는 게
중요할 때가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오디세우스 이야기 들으면서
그 생각이 계속 났습니다.
이번엔 오디세우스보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더 들렸다
이번에 들으면서 가장 달라진 부분은
가족 얘기였습니다.
20년 가까이 못 돌아온 오디세우스도 대단하지만,
그 시간 동안 집에서 그를 기다린 사람들도
만만치 않았겠다 싶더라고요.
아내 페넬로페.
아버지 없이 자란 아들 텔레마코스.
그리고 늙어가면서도 아들 소식 기다리는 아버지 라에르테스.
예전엔 이 사람들이
그냥 오디세우스 기다리는 조연 정도로 들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좀 다르게 들리더군요.
각자 자리에서 자기 삶 살아내면서
기다리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듭니다.
요즘 특히 이 부분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큰딸이 곧 결혼해서 부모로부터 독립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예전엔 자식 크면 당연히 독립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그 시기가 가까워지니 느낌이 좀 다르네요.
떠나는 사람도 새로운 삶 시작하는 거겠지만,
남는 사람도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번엔 오디세우스 모험보다
페넬로페랑 텔레마코스 이야기가 더 오래 남았습니다.
젊었을 때 들었으면
아마 괴물이랑 세이렌 얘기가
더 재밌었을 텐데 말입니다.
오디오북으로 들으니
오히려 더 잘 들리는 것들이 있다
예전에 요약된 줄거리로만 알고 있을 때는
몰랐던 부분도 많았습니다.
완역본을 쭉 들어보니
비슷한 장면이 계속 반복됩니다.
손님 오면 대접하고,
이야기 나누고,
신께 제 올리고 하는 장면들이 계속 나와요.
처음엔 솔직히 좀 지루했습니다.
'왜 자꾸 같은 얘기가 나오지' 싶기도 했고요.
그런데 계속 듣다 보니,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이런 행동들이
그냥 예의 정도가 아니었던 것 같더군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기준으론 사소해 보이는 행동도
그때 사람들한테는 다른 무게였던 것 같습니다.
운전하면서,
운동하면서 흘려듣듯이 들었는데도
이야기가 반복되는 리듬 덕분인지
오히려 놓치지 않고 잘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특히 운동할 때 들으니까
오히려 더 집중이 잘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세트 사이사이 쉬는 시간에
몇 문장씩 이어서 듣다 보니,
어느새 한 권이 훌쩍 지나가 있더군요.
나이 들면 같은 책도 다르게 들리는 것 같다
이번에 다시 들으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입니다.
책 내용이 달라진 게 아닌데,
듣는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젊을 땐 모험 떠나는 사람이 보였다면
지금은 돌아오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들립니다.
힘으로 문제 해결하는 장면보다
참고 기다리는 장면이 오래 남고요.
아마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 있어서겠죠.
살다 보면 생각대로 안 되는 일이 참 많습니다.
빨리 끝내고 싶어도 시간이 필요한 일이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기다리는 것뿐인 순간도 있고요.
그럴 때 무조건 버티는 것과,
상황 살피면서 자기 자리 지키는 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오디세우스도 그냥 무작정 버틴 건 아니었으니까요.
때론 돌아갈 길을 찾고,
때론 숨고,
때론 기다리면서 결국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번에 들은 『오디세이아』는
제겐 모험 이야기라기보다,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시간을 어떻게 견디는가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젊을 때 들었으면
아마 다른 부분이 남았을 겁니다.
근데 오십 넘어 다시 들어보니,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보다
'어떻게 잘 버티면서 돌아가야 할 곳까지 갈 것인가'
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 뭔가를 견디고 있는 분이라면,
혹은 가족이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분이라면
오디오북으로 한 번쯤 들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운전할 때나 운동할 때
틀어놓기 딱 좋더라고요.
같은 책도 언제,
어떻게 접하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들릴 수 있다는 것.
이번에 다시 들으면서
그걸 조금 알게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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